[대전지방보훈청] 민주주의의 꽃 4·19혁명
상태바
[대전지방보훈청] 민주주의의 꽃 4·19혁명
  • 뉴스밴드(편집부)
  • 승인 2019.04.18 21: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훈과 주무관 김봉현

꽃이 피고 새싹이 돋는 따스하기 만한 봄의 계절인 4월이 왔다. 오는 19일은 우리역사의 민주주의에 꽃을 피운 4·19혁명 59주년이 되는 날이다.

4·19혁명은 1960년 이승만 독재 정권과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혁명이다. 1960년 2월 28일 자유당은 민주당의 선거 유세장에 시민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행사를 개최하거나, 일요일임에도 학생들에게 등교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반대한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살리자” 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3월 15일에 마산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실종되었던 고등학생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제2차 시위가 다시 일어났고, 이후 4월 18일 고려대학교의 4천여 명의 학생들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 들자>는 선언문을 낭독,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던 중 괴청년들의 습격을 받았고, 일부 학생들은 큰 부상을 입었다.

이후 전 대학생들의 총궐기로 이어져 '피의 화요일'로 불린 4월 19일에 대학생은 물론 중·고교 학생들을 비롯 10만여 명의 서울시민이 시위에 참가해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독재타도를 외쳤다. 이러한 외침에 결국 4월 21일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각이 물러났고, 4월 26일 오후 2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민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타도하여 4·19혁명이란 민주의 꽃을 피우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6·25전쟁의 결과로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입은 직후였고, 남북은 완전히 분단되었으며, 사회적·경제적 미성숙으로 인한 극도의 혼란 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에 가까웠던 1960년대 민주화를 향한 외침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게 된 밑거름이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민주주의를 위해 공헌했던 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국민통합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국립 4·19 민주묘지에서 민주주의! 우리가 함께 가는 길이라는 주제로 4·19혁명 기념행사를 실시하는 등 여러 관계기관에서도 다양한 추모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4·19혁명 제 59주년을 맞아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고 민주화를 향한 외침이 헛되지 않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대한민국이라는 꽃으로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국민 모두 한마음 한 뜻으로 기원하길 바라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