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관수 칼럼] 밥 딜런과 노벨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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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관수 칼럼] 밥 딜런과 노벨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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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11.08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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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관수 문학평론가

요즘 한국의 문학인들의 위상이 땅에 떨어졌다. 

유명한 소설가와 시인들이 성희롱 파문의 쓰나미에 휩쓸리고 있다. 그동안의 문학적 업적은 소문이 널리 퍼지는 데에만 기여하고 그들의 인격을 모독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게다가 정치하는 사람들은 소설가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요즘 뉴스들은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리얼리티 의 효과가 더해져서 소설을 압도하고 있다. 막장 드라마라는 평을 듣는 드라마도 정치가들의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소설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는 대신 뉴스를 본다. 

설상가상으로 10월 13일에는 전세계 문학인들이 주목하던 노벨문학상이 수많은 문학계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미국의 대중가요 작사가 겸 가수인 밥 딜런에게 돌아갔다. 그동안 노벨 문학상을 일본의 가와바다 야스나리와 중국의 모옌이 받았으니 이제 우리도 받을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말이 있어왔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상을 수상해서 한껏 의기양양해 하며 혹시나 하면서 기대하던 노벨상은 미국의 팝송 싱어 송 작가에게 돌아갔다.

위대한 미국노래의 전통 속에서 참신한 시적 표현을 만들었다는 것이 스웨덴 한림원의 평가였다. 그리고 시적 표현 속에 평화와 인권, 반전, 철학이 담긴 시대의 저항정신을 담고 있으며,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는 밥 딜런의 가사를 감상하고 분석하는 강좌가 개설돼 있다는 점도 참작이 되었을 것이다.

Literature(문학)이라는 말이 Letter(글자)라는 말에서 유래했고 넓은 의미에서 글자로 된 것들은 모두 문학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베르그송이나 버트란트 러셀 등 철학자나 처칠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이나 미술, 조각, 시를 같은 문학의 범주에 넣었다. 음악은 소리를, 미술은, 점과 선, 색채를, 조각은 돌을 표현매체로 하고 있고, 시는 언어를 표현매체로 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 그림을 그린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소리로 그림을 그리면 음악이 되고, 언어로 그림을 그리면 시가 되는 것이다. 밥 딜런의 음악과 가사가 참신한 시적 표현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노벨 문학상을 준 것도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

그러면 한림원에서 평가한 밥 딜런의 가사에 나타난 참신한 시적 표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일단 기존의 평가를 살펴보았다. 노벨상은 작품이 좋아서 받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좋은 평론이 있을 때 받는다. 

그런데 밥 딜런 가사는 록 평론가의 입장에서 높이 평가를 받아왔다. “딜런의 언어는 그야말로 철학이요 사상이었다. 감상자의 가슴을 찌르는 통렬함을 지녔고 초현실적이었으며 이전의 대중가요에서는 목격할 수 없는 사고의 깊이를 간직했다.”는 데이브 마시의 평이 대표적이다. 

그의 노래는 문학과 비교한 것이 아니라 대중가요와 비교했을 때 돋보이는 가사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비평은 인상비평의 범주에 머물렀다. 어떤 철학과 어떤 사상이 있는지, 그리고 어떤 점에서 초현실적이고, 사고의 실체는 무엇이고, 깊이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밥 딜런은 그가 쓴 가사에 대해 설명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들(가사의 의미)이 무엇인지 결정하도록 둘 것"이라며 자신은 가사 해석에 있어 적임자가 아니라고도 했다. 이것은 평화와 인권, 반전 사상을 담고 있는 문학운동가의 관점이 아니라 신비평적 관점 즉 순수문학의 관점을 지닌 비평관이다. 

만약에 그가 반전이나 인권 등에 중점을 둔 작가라면 인권침해의 현실이나 전쟁의 참상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작가는 시대적인 사명을 가져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친숙한 순수와 참여의 관점으로 보면 밥 딜런은 순수에 기본적인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브레히트와 교류를 했으며,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밥 딜런의 말과 배치된다. 브레히트는 현실에 잘못이 있는 것을 비판만할 것이 아니라 혁명을 통해 잘못된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서사극을 창작했다. 그래서 전두환대통령 때에서 우리나라에서 그의 글은 금서로 유명했다. 

이처럼 두 개의 말이 서로 배치될 때 메타크리티시즘 관점에서 그러한 특성은 그의 본질과 무관한 것으로 평가한다. 밥 딜런이 흑인인권운동에 참여하고, 그의 노래가 반전운동에 불리워졌더라도 그의 가사는 그런 시대적 요소를 배제하고 작품 자체의 예술성을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대표작 “Blowing in the wind”을 보면 1절에서의 제재는 사람이 얼마나 걸으면(인생역정) 어른(?)이 되는지, 비둘기가 얼마나 날아야 백사장에서 쉴 수 있을지, 포탄은 얼마나 날려야 영원히 추방시킬 수 있을지를 묻고 있다. 

2절에서는 산은 몇 년이나 있어야 씻겨 바다로 가는지, 사람은 몇 년이나 지나야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 사람이 언제까지 서로 모른척 할 지를 묻고 있다. 3절에서는 얼마나 올려다 보아야 진짜 하늘을 볼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다른 사람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주검을 봐야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깨달을지를 묻고 있다.

이 모든 질문의 대답은 “그 대답은, 친구여, 불어오는 바람속에 있다. 그 대답은 불어오는 바람속에 있다.”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로 반복된다. 시는 감정이 극에 달한 순간을 노래한다. 사랑이든 슬픔이든 감정이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순간을 담은 것이 시이다. 

따라서 영탄법이 기본이고, 이 극한 감정이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가장 격한 감정으로 몰고가는 부분에 대한 반복이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격한 감정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 때문에 시와 노래는 짧다. 그러므로 어느 시, 어느 노래나 마찬가지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반복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아무도 알 수 없고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한 대답 모두가 한줄기 바람처럼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은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은 것 즉 불합리한 세계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밥 딜런은 방향은 달랐지만 목적지는 까뮈가 “이방인”에서 도달했던 불합리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공통분모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암시는 2절에 있다. “산이 씻겨 바다로 가기 전에 산이 몇 년이나 버틸 수 있을까?” 산이 씻기면 이론상으로 언젠가는 바다로 가겠지만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이것은 까뮈의 화법이다. 까뮈는 이 세상에 제일 불합리한 말을 찾으려다가 살인동기를 “햇빛이 빛났기 때문에”라고 하였다. 

만약에 합리적으로 햇빛이 빛나기에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매일 해가 뜨니까 일박 이일이면 인류가 멸망하는 것이다. 이보다 말도 안되는 말이 있을까?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찾다보니 산이 몽땅 바다로 가는데 몇 년이나 걸릴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몇 년이나 지나야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 사람은 언제까지 서로 모른척 할 수 있을지를 묻고 있다. 사람은 어디까지가 자유를 획득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완벽한 자유는 영원히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모른척 하는 인간의 감정도 사랑과 증오처럼 불합리성을 대변해주는 특성이다. 사랑이란 왜냐는 물음없이 그냥 좋으니까 사랑하는 것이다. 너같이 똑똑한 애가 왜 그런 애를 만나느냐고 말려도 소용이 없는 게 사랑이다.

다시 1절로 가면 사람은 아무리 걸어도 어른(?)이 될 수 없다. 인생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둘기는 모래를 찾아 쉬더라도 순간의 착각이다. 포탄을 쏘아버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포탄을 쏘면 그만큼 또 만들 것이기 때문에 포탄을 쏜다고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3절에서는 얼마나 올려다 보아야 진짜 하늘을 볼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다른 사람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주검을 봐야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깨달을지를 묻고 있다. 하느님을 생각하며, 고통스런 사람들의 어려움도 생각하고,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하자는 프로파간다로 읽힐 수 있다. 

이 부분이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대중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문학성이나 예술성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스웨덴 한림원이 문학의 영역을 확장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 있다. 문학의 영역을 장르라고 부르면 노래와 문학 사이에 있던 장르의 벽을 무너뜨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르는 생물학에서 나온 용어로 하나의 종은 끊임없이 태어나고, 번성하다가 언젠가는 소멸한다는 발생학적 관점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 장르의 성쇠를 보면 인류 역사와 더불어 세력을 가졌던 노래(시)가 1920년 경에 세력을 잃고 소설에 주도권을 넘겨주었다가, 영상매체의 발전과 더불어 장르의 주도권이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매체에게 넘어가고 있는 과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이 다른 장르에 노벨상을 넘겨주더라도 영상매체에 넘겨주었다면 시인이나 소설가들도 덜 섭섭했을 것 같다. 오랫 동안 한림원의 전화를 받지 않던 밥 딜런이 그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과분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상은 누구에게 주느냐에 따라 권위가 달라질 수 있다. 한림원의 이번 결정이 후에 어떠한 평가를 받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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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 2016-11-14 22:20:52
밥 딜런과 노벨 문학상 칼럼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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