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충남병무청] 병역의무 대한민국 안보의 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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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충남병무청] 병역의무 대한민국 안보의 초석
  • 2016년 병역명문가 나영학
  • 승인 2016.08.0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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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명문가 나영학

지난 6월 대전충남지방병무청에서 주관한 병역명문가 시상식에 참석하였다 병역명문가는 3대 가족 모두가 현역으로 병역의무를 이행한 가족을 선정한다.

우리 가문은 총 7명이 현역으로 병역의무를 마쳐 2016년 병역명문가로 선정되었다 오늘은 우리 가문이 병역명문가로 선정될 수 있는 토대가 되고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신 아버님의 군 시절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아버지는 6대 독자로 병역이 면제 대상임에도 해방 후 1947년 국군 창설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자원입대하였다.

국군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1947년 2월 서울로 간 아버지는 국방경비대를 찾아갔지만 독자라는 이유로 입대가 결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한 몸 조국에 바치겠다는 굳은 의지로 입대 결정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1947년 2월 15일 태릉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기본교육을 이수하고 연대본부로 배속 받아 국방경비대원이 되었고 이듬해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창설된 ‘대한민국국군’의 일원이 되었다. 아버님은 “태극기를 단 군복을 입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항상 말씀하셨다.

아버님이 GOP근무를 하던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하였다 3년간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온 6․25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새벽 전투에 정신을 잃고 깨어났지만 눈앞에는 많은 동료들의 시신이 난무 하였다고 한다 불과 3일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한강다리도 폭파되어 서울 인근에서 게릴라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후 전열을 정비한 국군은 낙동강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아버지는 의령 김해 등지에서 지원한 학도병 120명을 보충 받아 소대를 편성하고 대구 금오산 일대에서 전투에서 작전을 전개했다.

지연봉 고지를 탈환하고 보니 인민군 기관총사수는 몸이 쇠사슬로 묶여있었다 낙동강 전투가 한창일 때는 이처럼 힘없고 소중한 생명들이 수없이 목숨을 잃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1952년에는 인민군 포로가 있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발령을 받고 포로들을 관리했다 준동이 예상되는 정치사상으로 무장된 포로들의 폭동사건을 미리 감지하여 사전에 조치를 취해 많은 국군과 선량한 포로들의 수 백 명의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1953년 7월은 휴전을 앞두고 남북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빼앗으려고 밤낮없이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휴전이 된 이후 아버지는 이제는 나의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나라가 안정되었으니 이쯤에서 전역을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시고

1954년 중사로 제대를 하였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그리고 2009년 85세의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항상 나라의 안보와 튼튼한 국방력이 있어야 개인도 존재하며 행복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아버지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병역의무는 반드시 행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었다 특히 내 누나는 좋은 직장도 마다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여군에 자원입대 하였다.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병역비리 사건을 들을때마다 안타깝고, 한편으로는 아버지처럼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병역이행은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해야할 의무이다.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 하나가 우리나라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이유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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